본문 바로가기
생활하다 보니 기록

퇴사 후 갈 곳이 없어진 마음,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찾아봤어요

by livingnote-kr 2026. 6. 14.

직장을 그만두기 전에는 이상하게 자신감이 있었어요. 지금 있는 곳은 정말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컸고, 여기서 나오기만 하면 조금 더 괜찮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병원에서도 오래 일했고 보험이나 고객 응대 업무도 해봤으니, 이력서를 넣으면 적어도 몇 군데에서는 연락이 오겠지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퇴사하고 나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어요. 매일 채용공고를 찾아보고 이력서도 나름대로 고쳐서 넣었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시기가 안 맞나 보다 했지만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자 자신감까지 같이 줄어들었어요. 출근할 곳이 없다는 게 처음에는 홀가분했는데, 쉬는 시간이 길어지니 매일 내가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처럼 느껴졌고 또 힘들었어요.

나이는 계속 먹고 있고 아이들은 커가는데 저는 제자리에서 맴도는 기분이 들었어요. 가족이 직접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 괜히 눈치가 보였고, 별일 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면 또 하루를 허비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어요. 이대로 계속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드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는 보이지 않았죠.

계속하던 일을 해야 할지 전혀 다른 일을 해야 할지

요즘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는 거예요. 예전에 해왔던 병원이나 보험, 고객 응대 쪽 일을 다시 찾아야 할지, 아니면 물류센터나 식당처럼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해야 할지 마음이 계속 바뀌어요. 해오던 일을 선택하면 적응은 조금 빠를 것 같지만 또 비슷한 이유로 지치고 그만두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돼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니 나이가 마음에 걸리고, 체력이 버틸지도 모르겠고, 지금부터 처음 배우는 사람을 누가 반길까 싶은 마음도 들었죠. 어느 쪽을 골라도 확신이 없으니 지원 버튼 하나 누르는 일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 빨리 결정해야 할 것 같은데, 급한 마음으로 아무 곳이나 들어갔다가 또다시 그만두게 될까 봐 그것도 겁이 나고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영화를 알게 됐어요. 줄거리와 감독의 이야기를 찾아보는데 지금 제 마음과 닮은 부분이 많아 자꾸 눈길이 갔어요.

일자리를 잃은 영화 프로듀서의 이야기였어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주인공 찬실은 오랫동안 영화 프로듀서로 일한 사람이에요. 함께 일하던 감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찬실의 일도 한순간에 끊겨버려요. 살길이 막막해진 찬실은 산동네로 이사하고,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자신이 해오던 영화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해요.

찬실이 마주하는 건 단순히 월급이 끊긴 문제만은 아니었어요. 영화 일을 빼고 나면 자신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지,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였어요. 줄거리만 읽었는데도 마음이 찡한 게... 저도 퇴사하고 나서 월급이 끊긴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직장에 다닐 때는 일이 힘들다고 불평했지만, 막상 그 자리가 없어지니 제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조차 잘 보이지 않았어요. 이력서를 내도 연락이 없으면 그동안 해온 일까지 모두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거든요. 찬실의 이야기가 유난히 마음에 들어온 이유도 그 부분이었어요.

김초희 감독도 오랫동안 영화 프로듀서로 일했다고 해요

이 영화와 감독님이 더 궁금해진 건 김초희 감독님의 이력을 보고 나서였어요. 감독은 대학에서 불문학을 공부하고 프랑스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한 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여러 독립영화의 프로듀서로 일했어요. 단편영화를 만들다가 〈찬실이는 복도 많지〉로 첫 장편영화를 세상에 내놓았고요.

그러니까 이 영화는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상상해서 만든 작품만은 아니었어요. 감독 자신도 오랫동안 영화 현장에서 일했고, 일을 쉬면서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돌아본 경험이 있었어요. 그래서 일자리를 잃은 뒤 자기 삶의 방향까지 흔들리는 찬실의 마음을 더 현실적으로 그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감독은 예고 없이 찾아온 불행으로 뒤엉킨 삶을 사람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어요. 혼자서 갑자기 인생을 뒤집는 성공담이 아니라, 서로 위로하고 보듬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는 말이 오래 남았어요.

왜 이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을까요

사람들은 일이 끊기면 보통 빨리 다른 일자리를 찾으라고 말해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막상 당사자가 되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오래 해온 일이 사라지면 돈보다 먼저 자신감이 흔들리고, 나는 이제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거든요.

김초희 감독이 찬실의 이야기를 만든 이유도 그런 마음과 닿아 있는 것 같았어요. 불행은 미리 알려주지 않고 찾아오고, 사람들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엉켜버린 삶을 다시 정리해야 해요. 그 과정에서 혼자 모든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부딪히고 위로받으며 조금씩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거예요.

저는 이 부분이 좋았어요.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거나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었거든요.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말조차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데, 이 영화는 우선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부터 보여주는 작품처럼 느껴졌어요.

퇴사하고 나니 경력까지 사라진 것처럼 느껴져요

이력서를 내도 연락이 오지 않는 날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 회사 조건보다 제 문제를 먼저 찾게 되더라고요.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한 직장에서 오래 버티지 못해서 그런가, 새로 가르쳐야 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 아닐까 별생각이 다 들었어요. 회사에서 이유를 말해준 적도 없는데 혼자 답을 만들고, 그 답으로 다시 저를 깎아내리고 있었어요.

병원에서 일했던 시간도 있고 고객을 상대하며 버텨온 경험도 있고, 아이 둘을 키우면서 생활을 꾸려온 시간도 있는데 채용 연락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그 모든 경력을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했어요. 직업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까지 없어지는 건 아닌데, 당사자에게는 정말 모든 게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잖아요.

저도 일을 쉬는 동안 제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여러 번 느꼈어요. 하지만 누군가 저를 바로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제가 살아온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어요. 지금까지 해온 일을 제가 먼저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어요.

퇴사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현실

직장에 다닐 때는 그곳의 힘든 점만 크게 보였어요. 여기만 벗어나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고, 다른 곳으로 가면 지금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퇴사하고 나니 월급뿐 아니라 정해진 생활과 사람을 만날 이유까지 같이 사라졌어요.

그렇다고 퇴사한 선택을 무조건 후회하고 싶지는 않아요. 당시에는 그만두고 싶었던 이유가 분명히 있었고, 계속 남아 있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다만 나오기만 하면 다음 문이 바로 열릴 거라고 생각했던 건 현실과 달랐어요.

지금은 제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건지, 눈을 낮추고 아무 일이나 먼저 해야 하는 건지 판단하기 어려워요. 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시 시작하는 일이 더 어려워지는 느낌도 들어요.

내가 가진 경험을 너무 작게 보지 않으려고 해요

저는 아직 어떤 일을 선택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어요. 병원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사무직을 조금 더 찾아볼 수도 있고, 현장 운영이나 식당 일을 시작할 수도 있어요. 예전처럼 한 번에 완벽한 직장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오래 다닐 수 있는 시간인지, 제 체력이 감당할 수 있는지, 급여가 생활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를 먼저 보려고 해요. 지금까지 해온 직업과 이름이 다르더라도 사람을 상대하고, 예약을 관리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했던 경험은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새로운 일을 선택한다고 해서 지나온 경력을 모두 버리는 건 아닐 거예요.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다른 장소에서 쓰는 방법일 수도 있어요. 이 말을 아직 저도 완전히 믿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제 경력을 제가 먼저 무시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아직 영화를 보지는 않았어요

저는 아직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글을 영화 감상문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지금 제 마음과 닮은 영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어떤 영화인지, 감독은 왜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는지 찾아보며 쓴 기록에 가까워요.

오히려 영화를 보기 전에 감독의 이야기를 먼저 알게 되니 더 보고 싶어 졌어요. 일을 잃은 찬실이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이 해온 일을 어떻게 다시 바라보게 되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요. 영화를 본 뒤에는 지금 쓴 글과 제 감정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도 다시 남겨보려고 해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제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어요. 아직 영화를 보지도 않았고, 내일 당장 어디로 출근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오랫동안 한 일을 잃고 자신까지 사라진 것처럼 느끼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조금 위로가 됐어요.

김초희 감독도 오랫동안 영화 일을 하다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첫 장편영화를 만들었어요. 눈에 보이는 결과가 바로 없었다고 해서 그동안 살아온 시간이 사라진 건 아니었고, 결국 그 시간이 한 편의 영화로 이어졌어요.

저도 지금은 다음 직장을 찾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게 제 삶의 마지막 모습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보려고 해요. 계속해온 일을 다시 선택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할 수도 있어요. 답이 보이지 않는 이 시간도 언젠가는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게 해 준 과정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